광주이씨(廣州李氏)의 정체성(正體性) - 시하(時夏)가 묻고 명환(明煥)이 답(答)하다 - 문(時夏):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광이 가운데 “시조 문제가 왜 그리 중요하냐. ‘이자성’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냐”란 말도 있어요. 답(明煥): 그것은 문중(門中)의 정체성(正體性)에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문: 그럼 정체성이 무엇인지요? 답: 정체성은 어느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만이 갖는 특유의 동질성(identity)을 말해요. 어느 한 가문(家門)이 그들만이 갖는 동질성을 잃는다면, 그 문중은 문중으로서 더 이상의 존재 가치가 없게 돼요. 문: ‘신라 내물왕 재위(서기356~402)때 이자성(李自成)’이라하면 왜 문제가 되는지? 답: 그 당시 이씨(李氏)는 오직 ‘경주(월성)이씨’만 있었으니, 우리 광이는 자연스레 경주이씨 계열에 들게 돼요. 그에 따르면 700여년 깊게 뿌리내린 소중한 우리의 정체성이 소멸되고 마는 것이지요. 문: 내물왕 때 우리의 성씨가 ‘칠원이씨’였다고 주장한다면? 답: “고금의 역사서를 아무리 뒤져도 ‘칠원이씨’는 없다”고 판서공(夏源)이 말한 바 있어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수많은 도서 자료를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오늘날 아무리 찾아보아도 ‘칠원이씨’는 고금(古今)에도 없어요. 문: 내물왕(재위356〜402) 전후해서 경주(월성)이씨 외에 다른 이씨(李氏)는 전혀 없었다는 말인가요? 답: 그전에는 없다가, 통일신라(676) 이후 연합군으로 와 있던 당나라 장군이 신라에 귀화하여 이룬 중국계 이씨가 시작돼요. 연안이씨가 대표적이지요. 문: 칠원에 ‘칠원윤씨’가 있다고 들었어요. 답: 현재도 함안의 칠원에 세거지를 이뤄 살아오고 있는 칠원윤씨 들은 태종무열왕(재위654〜661)때 자기네 시조가 칠원성 성백에 올라 신라가 망할 때까지 7대를 세습해 왔다고 주장해요. 문: 그간 전해 내려오는 ‘이자성’에 대해서는? 답: ‘이자성’에 얽힌 이야기는 ‘전설’로서의 가치만 있어요. 전설은 전설이고, 사실은 사실(fact)이지요. 경술보(1610)이래 발행된 족보 마다 이것은 ‘항간에 떠도는 언전잡기(諺傳雜記)’라 했어요. 문:‘이자성’이란 인물이 신라 내물왕 때 ‘칠원 성백(성주)’이면서 ‘내사령(內史令)’을 지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답: 이것은 앞뒤가 안 맞아요. 이때 칠원성은 가야(伽倻)국에 속한 성으로서 신라와는 적대관계였어요. 적국인 신라에서 내사령(총리)직을 맡는 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문: 신라의 ‘내사령’이란 직책은? 답: ‘내사령’직은 ‘내각총리’에 해당하는 최고위직으로서 고려시대 생겨난 제도였어요. 고려의 ‘내사령’직은 신라의 ‘각간(角干)’에 해당되고, ‘각간’직은 진골(眞骨) 출신만이 될 수 있었어요. 우리 광이가 신라 때 진골이었단 말인가요? 문: 우리 광이가 진골 출신이었다면 안 되는지요? 답: 신라 때 이씨(李氏) 성으로서 진골은 오직 ‘경주(월성)이씨’였어요. 그렇게 되면 ‘이자성’이 진골 경주이씨로서 각간(角干)직에 올랐다는 말이 돼요. 문: 일각에서는 ‘대각간(大角干)’직에 올랐다고 주장하는데요? 답: ‘대각간(대서발한)’이란 벼슬은 내물왕 재위(356〜402)시에는 없던 벼슬인데, 백제를 멸망(660)시킨 공로로 태종무열왕이 김유신 장군에게 새로 만들어 내린 벼슬이에요. 문: 전설에 의하면 칠원성백 이자성이 왕건에 끝까지 항전한 죄로 회안(광주)으로 강제 이주 했다고 해요. 답: 그러면 내물왕 때부터 왕건까지가 600여년이 되니, 이자성이 600살까지 살았다는 말이지요. 이런 게 모순이 되니 칠원성 세습설로 바뀌었지요. 문: 칠원성 세습설이란 무엇인지요? 답: 이자성이 내물왕에게 공로를 세워 후손들이 칠원성을 세습해 오다가 이자성의 후손 한희(漢希) 장군에 이르러 왕건에게 패했다는 것이지요. 문: 그러면 무엇이 문제 되나요? 답: 서기562년에 신라가 가야국의 칠원성을 점령해요. 그러면 이자성 후손들이 가야국 성주로서 신라에 항복한 것이 되니 이야기가 두죽박죽이 돼요. 문: ‘한희’라는 인물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해요. 답: ‘한희’라는 하나의 인물이 어느 곳에는 신라 초, 다른 곳에는 신라 말, 다른 어느 곳에는 고려 말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렇게 되면 손자가 아비가 되기도 하고, 몇 대 조상이 몇 대 후손이 돼요. 이것이 바로 패륜이라는 것이지요. 문: 이자성을 필두로 하는 ‘상대 소목도’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답: 전혀 근거가 없어요. 이것은 ‘1987년 대동보를 만들 때 공통의 시조를 세우기 위해 실무자들이 떠도는 전설에 따라 가공인물을 만들어 넣은 것이지요. 우리 廣李문중의 족보는 1500년대에 동고상공께서 최초로 만드신 광릉세보(廣陵世譜)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고, 현존하는 경술보(1610년), 갑진보(1724년), 병진보(1796년), 계유보(1873년), 기미보(1919년) 등 5대족보 어느곳에도 없고, 선대 조상의 어떤 비문(碑文)에도 없는 것이에요. 문: 흔히 인용하는『만성보(萬姓譜)』나 『전고대방(典故大方)』은 믿을 만한 문헌인가요? 답: 『만성보』는 1864년 고종 때 조선의 수백 가지 성씨를 있는 대로 수집하여 필사(筆寫)해 놓은 것으로 펴낸이(編者)도 없어요. 『전고대방』은 1924년 김효석이 수백 가지 성씨의 시조라 수집해 놓은 것으로, 국가의 중심 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이 책에 대해 “내용 자체가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기보다는 알기 쉽게 편찬한 것이 특징”이라 했어요. 여러 가지 성씨를 있는 대로 모아놓은 것으로 구전이나 전설에 불과하여 고증(考證)과 확인같은 것은 불가하지요. (註: 그간 우리 광이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이 날 때마다 이 분야에 밝으신 우리 문중의 명환박사께 문의해온 바를 모았다가 궁굼해하시는 분께 도움이 될 것 같아 여기 싣는다. 24대손 시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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