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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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의 족보는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내신 동고 이준경 선생께서 처음 편찬 하셨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임진왜란중 모두 없어져 버렸고, 지금까지 전해 오는 족보 중 제일 오래 된 것은 한음 이덕형선생이 서문을 쓰신 경술보이다.
위의 사진은 한음선생 친필로 경술보 서문의 일부인데 현대문으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족보서문4 계유보(癸酉譜)

廣州李氏族譜 癸酉譜重刊序

보법(譜法)이 생긴지는 오래되었다. 우리 종중(宗中)에도 예전에 세보(世譜:系譜를 묶어 엮은 책)가 있었으나 임진병화(壬辰兵火)에 소실(燒失)되여 전하지 못하였고 경술(庚戌:1610)년에 문경공(文景公)의 오대손(五代孫)이신 시정공(寺正公:士修)께서 성보(姓譜)를 편찬(編纂)하시니 우리 선조(先祖) 문익공(文翼公:漢陰)께서 서문(序文:머리말)을 지으셨다.
그 후 갑·병양보(甲·丙兩譜)가 출간(出刊)되었으나 세월이 오래되고 대수(代數)가 멀어져서 돈목(敦睦)의 의가 점점 소원하게 되니 항상 염려되던 바이다. 지나간 을유(乙酉)년에 제종(諸宗:여러 일가붙이)들이 보첩(譜牒:族譜)을 중간(重刊:이미 펴낸 책을 거듭 박아 냄)하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당시 내가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어 일년이 지나도록 편찬을 못하고 있던 중에 일부 종원(宗員)이 보규(譜規)에 위배(違背)되는 위보(僞譜:不正한 族譜)를 발간함에 우리 파(派)와 칠곡(漆谷)·보성양파(寶城兩派)의 수단(收單)이 들지 않았으니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위보(僞譜)가 이미 나왔으매 곧 정보(正譜)를 수찬(修纂:書冊을 만듬)하여야 할 것이나 차일피일(此日彼日) 수십년이 지났다. 경오년(庚午年) 봄에 경향제족(京鄕諸族:各地의 宗員)이 모여서 보사(譜事:족보에 관한 일)에 대하여 나에게 물으니, 내가 말하기를『복보(族譜)를 하기로 하면 마땅히 깨끗이 하여야 된다』고 하니 제종(諸宗)이 찬동함으로 드디어 절목(節目:條目)을 전보규례(前譜規例:앞서 족보의 규칙과 정한 예)에 의하여 정하고 다음해에 이르러 발간하게 되었다.
내가 외람됨을 불고(不顧:돌보지 않음)하고 전말(顚末:처음부터 끝까지의 경위)을 기록하여 후예(後裔:후손)에게 고하노니 우리 광이(廣李)는 동방승국시(東邦勝國時:동쪽 나라로서 前朝 때, 즉 고려조임)부터 명성(名聲)이 높았고 아조(我朝:本朝)에 와서 문무겸전(文武兼全:文武를 아울러 갖추고 있는 것)한분이 많이나셔서 덕업(德業)이 빛나니 당세(當世)에 수요(需要:필요한 것을 얻고자 하는 일)가되고 후예에게 영광이 됐는데, 실은 선조(先祖)께서 인(仁)과 덕(德)을 쌓으셔서 후손(後孫)에게 복(福)이 되게 한 것이다.

족보(族譜)를 같이 하는 우리들은 선조의 뜻을 본받아 살아감에 욕됨이 없으면 이씨(李氏)의 업(業)이 다시 창성(昌盛)하여 천지(天地)와 더불어 무궁하리라 ! 여러 종원들은 이 점을 깊이 헤아려주기 바란다.

高宗十年 癸酉(1873)年 秋
輔國崇祿大夫 判中樞府事兼吏曹判書 宜 翼 삼가 씀

廣州李氏族譜 癸酉譜重刊序

우리 이씨(李氏)는 처음으로 고려말에 나타나서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공경(公卿)과 훌륭한 보필이 많이 나왔고 문장(文章)과 공적(功績)들이 문헌(文獻)에 빛나게 되었으며 자손들이 번성하여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분이 연달아 나게되니 이것은 조상님의 쌓은 덕(德)이 두터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시조(始祖)로부터 본다면 본시 한뿌리나 복(服)이 시마 소공(小功)을 다한 즉 점점 소원(疏遠)해지게 됨에 따라 친애(親愛)하는 정(情)이 스스로 엷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사람의 몸에서 나누어져서 마침내 딴 사람같이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가(一家)간에 친분(親分)이 엷다기 보다는 그 사이에 대수(代數)가 멀어져 내려온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일가 간에 친분을 두텁게 하자면 그 일가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나오게 된 것인가를 알아야 추모(追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지는 것이며, 일가간에 화목코자하면 반듯이 어디서부터 갈라졌나를 알아야 친애(親愛)하는 길이 두터워질 것이다.
옛날부터 모든 사람이 많은 일가를 족보에 모으고 서로 의리를 두텁게 한 것이 이 때문이다. 우리 이씨(李氏)의 족보가 있었으니 처음에 우리 충정공선조(忠正公先祖)께서 세보(世譜)를 꾸며내어 활자(活字)로 찍어서 내셨고, 시정공선조(寺正公先祖)께서 성보(姓譜)를 중수(重修)하여 충정공(忠正公)의 유적(遺蹟)을 계술(繼述)하셨을 대, 문익공(文翼公:漢陰)께서 서문(序文)을 쓰시니 경술보(庚戌譜)가 이것이다.

그리고 갑진년(甲辰年)에 이르러 정졸재공(貞拙齋公)께서 그 선고(先考)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그전 수단(收單)된 초고(草稿)를 교정(校正)하여 그의 숙부(叔父)이신 농은공(農隱公) 북백리소에서 인쇄가 끝나니 삼기재공(三棄齋公)께서 서문(序文)을 쓰셨다.
병진보(丙辰譜)는 참판공 상도씨(參判公尙度氏)가 괴암공 동찬씨(槐菴公東贊氏)와 같이 교정(校正)과 간행(刊行)을 주관(主管)한 바 자세하고 간략하게 잘 되었고, 넣고 뺀 것을 분명(分明)이 하여 제족(諸族)들에게 지금까지 칭송(稱頌)을 받는다.
을유년(乙酉年)에 이르러서 사적(私的)으로 파보(波譜)를 만든바가 있는데 그간에 착오된 것이 많으니 이 어찌 선대(先代)를 이어 수족(收族)할 수가 있겠는가? 합보(合譜)를 해서 바로잡자는 의논이 난지는 오래지만 재정(財政)이 어렵고, 일도 커서 얼른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걱정만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종장(宗丈) 판부사 의익씨(判府事宜翼氏)가 여러 종인(宗人)들의 부탁으로 일을 꾸미고 재정을 마련하여 기유년(己酉年)에 부당(不當)하게 들어온 자들을 다 빼어버리고 한결같이 병진보(丙辰譜)의 깨끗한 규정(規程)대로 시작하여 이년(二年)만에 일이 끝나니 돈목(敦睦)하는 의(誼)가 이때부터 흐뭇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족(足)히 선조(先祖)님들의 많이 쌓으신 덕(德)으로 이루어진 경사라 할 것이다.
무릇 후손(後孫)들은 집집마다 전(傳)하고 대대로 지켜서 틀림없이 할 것이며 또한 이 뒤를 따라서 더욱더 잘 꾸며나가면 이 족보(族譜)가 거의 무궁하게 전할 것이로다.

今上卽位十年 癸酉(一八七三)年 秋
嘉義大夫 行吏曹參判 容 學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