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계종회

Home/광주이씨역사/방계종회

십운과공 휘 자령 행장(十韻科公 諱 自齡 行狀)

생원공(生員公)의 넷째 아드님이시며 십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참의(參議 正三品)에 오르시다.
공의 장자 연동(蓮仝)公은 장악원정(掌樂院正) 증 참판(參判)하시고, 손(孫) 봉로(蓬老)공은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시며, 공의 증손 두신(斗信)公은 태종조(太宗朝)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로 병자문신옥사(丙子文臣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되고 장흥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신원되고 시(諡) 충민(忠愍)이다. 동부면 덕풍리에 公의 묘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실전하여 광주군 실촌면 유사리에 설단을 모셨다.
이후 단촐한 종족으로 살면서 대소관작(大小官爵)이 많이 나왔으며, 특히 1919년 기미 3.1독립선언 삼십삼인 대표의 한분인 종훈선생(鍾勳先生)이 公의 21대손으로 크게 명예로운 문중이다.
근안(謹按) 을해(乙亥) 1995년 춘(春)에 대종회가 비용을 지원하고 도유사 효영(孝暎)과 기획유사 천희(天熙) 양씨(兩氏)가 초혼(招魂)하여 지원금으로 판서공(判書公) 묘상단에 봉영(封瑩)을 조성하고 묘비 및 각종 의물을 설치하였다. 묘비명은 대종회 문화유사인 창순 현종(昶淳 賢宗)이 찬(撰)하였다.
근안(謹按) 광주이씨기미보(廣州李氏己未譜) 및 정묘대동보(丁卯大同譜)의 행장기록은 우기와 같으나 1997년 10월 증호조좌랑공휘섬(贈戶曹佐郞公諱暹)의 비문(碑文 : 강희<康熙> 56년 1717년 영의정 이여공이 찬함)에 고려조 관직이 판서라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고려조 판서는 조선조 참판이나 참의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십운과공 휘 자령 비문

공의 휘(諱)는 자령(自齡)이며 광주인이다.
여말(麗末)의 석학 둔촌선생(碩學 遁村先生)의 실제(實弟)시니 황고(皇考) 휘 당(諱 唐)께서는 본주리(本州吏)로 근칙하고 유현행(有賢行)하여 국자생원에 오르신 분이다. 황비 인화이씨(仁華李氏)는 본주태수의 따님이시다.

광주이씨의 선대는 신라 충신의 후예로 신흥 고려국에 손국(遜國)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왕건태조(王建太祖)의 명에 따라 칠원성백(漆原城伯)의 신분에서 본주향리(本州鄕吏)로 몰락 아전(衙前)을 세습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백여년간 그 후손들은 실지를 회복하고 더 이상 천한신분만은 상속하지 않겠다는 강한 집념이 유풍으로 전수하는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공의 대에 이르러 급기야는 오형제 구등문과(俱登文科)라는 신화를 창출하고 현달(顯達)의 문을 열었음으로 각계 공(共)히 각위 일대조로 표기한다. 인령(仁齡), 집(集), 희령(希齡), 자령(自齡) , 천령(天齡) 오형제중 넷째로 여대 충목왕조(忠穆王朝)에 십운과에 급제한 공의 용모는 둘째 백씨(佰氏) 둔촌선생(遁村先生)을 닮아 장중하고 강의(剛毅)하였으며 기품은 준수하였다고 한다. 관(官)은 통정대부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參議)에 올랐으나 려망(麗亡)의 한을 품고 잠적 은둔함으로써 졸년대 및 매골처(埋骨處)를 알지 못함이 본손들의 한결같은 유한(遺恨)이 되어 왔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후손들의 생활이 곤궁하여 독립된 설단영역(設壇塋域)을 갖추지 못하고 증손 판서공 묘역에 위치한고로 기해(己亥) 1995년 춘(春)에 대종회 지원으로 판서공 상단 길지에 초혼(招魂)으로 봉영(封瑩)을 조성하고 묘비 및 각종 의물을 구비하니 육백여년간의 숙원을 성취하게 되었다.
배(配)는 숙부인 선산김씨(淑夫人 善山金氏)로 현령을 지낸 분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광주 고읍 역촌 후건좌였으나 역 실기처(亦 失其處)하였다. 이후 많은 후손들이 출사하여 공의 위적수훈을 계승하니 자 연동(蓮仝)은 통훈대부장악원정(通訓大夫掌樂院正)이고 증 호조참판이며 손 봉로(孫 蓬老)는 행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 자헌대부이조판서(贈 資憲大夫吏曹判書)다.
증손 두신(斗信)은 한림옥당(翰林玉堂)을 거쳐 자헌대부공조판서(資憲大夫工曹判書)에 올랐으나 병자문신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되고 장흥에 유배 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신원되니 시 충민이다. 현손 비(玄孫 庇)는 서사찰방전의현감이며 내손 숙경(來孫 叔耕)은 문과부사이고 숙강(叔剛)은 문과찰방이며 숙정(叔貞)은 서사생원이고 숙명(叔明)은 순처부사다. 곤손 침(昆孫 琛)은 장흥군지 기록에 의하면 성종조(性宗朝) 세자사부 문장학문 명어일세(世子師傅 文章學問 鳴於一世)라 하였으며, 발동은 서사군수(筮仕郡守)니 장흥입향조(長興入鄕祖)이고 척은 통정대부행호군수운판관이다.

운손 지분(蕓孫 之墳)은 문과군수(文科郡守)요. 십일대손 호선(好善)은 장사랑(將士郞)인데 장악원정(掌樂院正)이 증직 되었다. 십이대손 섬(暹)은 효가 절륜(絶倫)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이 증직 되었으며, 개화운동에 가담 민족혼을 고취하였고 기미년 독립선언 시에는 삼십삼인민족대표로 서명함으로써 청사에 갈이 빛나는바 되었다.
이십이대손 관영(寬永)은 종훈(鍾勳)의 자로 의병을 모집하여 침략자 왜군과 전투 중 용문산에서 산화(散華)하니 이 모두가 공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명왈(銘曰)

오호라. 종의 진리는 만고의 불변일세
신라(新羅)는 망했어도 칠원성백(漆原城伯)이 있다하며
손국(遜國)을 거절하고 항전을 계속하다
본주리로 몰락하여 아전을 세습해도
기개만은 변함없이 가세중흥(家勢重興) 호시탐탐
사백년을 한결같이 기회만을 찾았기에
공의 대에 이르러는 다섯 분의 안행이
안서(雁序)처럼 문과급제(文科及第) 신화를 창출하고
선망의 적(的)되었으며 웅비(雄飛)를 시작했네
왕씨고려 패망하고 이씨조선건국(李氏朝鮮建國)되니
신복을 거절하고 어디론가 은둔(隱遁)하여
선대조가 지킨 절의(節義) 그대로 따르셨네
고덕(高德)을 숭모함에 본방손이 따로 있나
영혼은 안도하고 후손들은 감읍하여
음덕(蔭德)은 영영세세 옛 영화(榮華) 찾게하리

광복후 초을해 정월 초오일
방이십대손 창순 근찬(昶淳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