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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판공 휘 극기 신도비

가정대부 지중추부사 원봉 이공 행장(嘉靖大夫知中樞府事圓峰李公行狀)

공(公)의 휘(諱)는 극기(克基)이고 자(字)는 백온(伯溫) 또는 자안(子安)이며 호(號)는 원봉(圓峰)이다.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승국(勝國:고려조를 말함)시대에 비롯하여 대대로 훌륭한 분들이 배출함으로써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 되었는데 사실은 둔촌선생(遁村先生) 휘(諱) 집(集)께서 집안을 일으킨 것으로 그분의 학문(學問)과 지절(志節)은 세상에 추앙(推仰)을 많이 받고 있다. 이 분의 아들 휘(諱) 지직(之直)은 포은(圃隱)한테 배웠는데 학문의 올바름과 처사(處事)의 공정함은 일찍이 선생(先生)의 추장(推奬)을 받았고 문과(文科)하여 벼슬이 형조우참의(刑曹右參議)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맨 먼저 뽑혔다.

경진년(庚辰年:正宗一年, 一四○○) 소도(昭悼:芳碩이 昭悼世子이다.)의 변에 말고삐를 붙잡고 극렬하게 간(諫)하자 태종(太宗)이 극현으로 다스리려 하니 변춘정(卞春亭:季良)이 말하기를,「「이모(李某)의 충의(忠義)는 일월(日月)과 광명(光明)을 다투고 이제(夷齊:伯夷와叔齊)와 절조(節操)가 비등하여 삼대(三代) 뒤로의 유직(遺直:옛사람이 남겨놓은 정직한 사람이란 뜻)이요. 천재(千載)의 이후로는 하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하여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금고(禁錮)를 당하여 광주(廣州)의 탄천(炭川)으로 물러나와 사니 학자(學者)들이 탄천선생(炭川先生)이라 불렀다.

이분의 아들 예손(禮孫)은 문과(文科)하여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되었는데 이분들이 공의 증조와 조부 그리고 아버지의 삼세(三世)인바 삼세(三世)의 청렴한 절조와 문장의 명망은 모두 한 시대의 으뜸이었고 백세(百世)토록 사표(師表)가 될 만하였다. 비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는 현감(縣監) 서(曙)의 따님인데 세종(世宗) 병오(丙午:世宗八年, 一四二六)에 공(公)은 서울집에서 살았다. 공은 풍채가 준수하고 지기(志氣)는 고상하였는데 병인년(丙寅年)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직되었고 문종(文宗) 임신(壬申)에 호조(戶曹)의 낭관(郎官)이 되었다.


참판공묘소

단종(端宗) 계유(癸酉:端宗元年, 一四五三)에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올라 예문관(藝文館) 봉교(奉敎)와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를 거쳐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으로 옮겼으며 세조(世祖) 을해(乙亥)에는 경연(經筵)의 사경(司經)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쳤고 무인년(戊寅年)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郞)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로 옮겨 곧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올랐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겸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을 지냈다. 계미년(癸未年)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겸(兼) 시강관(侍講官)에 제수(除授)되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쳤으며 얼마 후에는 호조 정랑(戶曹正郞) 겸(兼) 춘방문학(春坊文學:春坊은 世子侍講院의 異稱)으로 옮겼다.

병술년(丙戌年)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이조정랑(吏曹正郞) 겸(兼)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에 제배(除拜)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올랐다.

성종(成宗) 경인(庚寅)에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오셨다.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제신(諸臣)중에서 남질 주백손(朱伯孫) 이극기(李克基) 최자빈(崔自濱) 유진(兪鎭) 김서 등은 경의(經義)에 밝고 행의(行誼)도 분명하니 마땅히 중용(重用)하여야 합니다.」 하고 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 「이들은 모두 사유(師儒:대사성 이칭)를 맡을만한 사람입니다!」 하니 이내 전조(銓曹:이조와 병조를 지칭하는 말)에 내리셨다. 그러나 당시의 세론(世論)은 경의에 밝고 행의가 분명한 사람은 이극기(李克基) 한 사람 뿐이고 나머지는 훈고나 익혔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이 해에 통정(通政)에 올라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겸(兼)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제배되었다. 신묘(辛卯)년 때 관동(關東)을 안찰(按察)하게 되었는데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 한명보(韓明輔)등이 상소하여 공을 몇 년만 더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현재(賢才)라도 한 일에만 얽매일 수는 없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들어와 경연(經筵)에서 〔맹자(孟子)〕를 강(講)할 때에 공이 시강관(侍講官)으로써 아뢰기를「임금은 사람을 씀에 있어서 잘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가릴 때에는 모름지기 좌우에 있는 여러대부(諸大夫)와 국인(國人)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사람을 살필 때에 임금의 마음이 저울처럼 공평하지 못하면 경중(輕重)을 판단할 수 없고 거울처럼 밝지 못하면 연치(고은것과 추한것)가 뒤섞이게 되므로 임금의 마음가짐이 공평한 연후에라야 비로소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참판공 보촌서원 신당

임진년(壬辰年) 뒤에 다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겸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제수 되었는데 특히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으로 있으면서 경연(經筵)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십조(十條)의 상소(上疏)를 올렸는 바 「첫째 하늘의 경계(警戒)를 조심하고, 둘째 습속(習俗)을 바루고, 셋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革罷)하고, 넷째 과전(科田)을 복구(復舊)하고, 다섯째 정병(政柄)을 중히 하고, 여섯째 선용(選用)을 공평히 하고, 일곱째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고, 여덟째 낭비를 줄이고, 아홉째는 언어(言語)를 넓히고, 열번째 법금(法禁)을 엄히 하고」 등 이었는데 무엇하나 당면한 급무가 아닌 것이 없어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갑오년(甲午年)에 특별히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배되었는데 공이 야대(夜對) 에서 고려사(高麗史)를 강(講)하다가 홍경(洪慶)이 당(唐)나라 민부(지금의 福建省)에서 대장경(大藏經)을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에 이르니 임금이 친히 맞았다는 대목에 이르러 공이 아뢰기를 「이는 전조(前朝)가 망하게 된 원인입니다.

당시에 불(佛)을 숭상함이 더욱 심하여 사찰(寺刹)은 여염(閭閻)을 차지하고 전장(田庄)이 관부(官府)보다 많았으며 세가(世家)의 자손(子孫)까지 머리를 깎고 중(僧)이 된 자 많았는데 요승(妖僧) 신돈(辛旽)에 이르러 마침내 나라를 망쳤으니 이는 경계할 일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는 절을 혁파하고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모조리 몰수(沒收)하여 관가(官家)에 귀속시켰는데 이는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을미년(乙未年)에 임금이 경연(經筵)에 납시어 좌우를 돌아보고 묻기를 「성균관(成均館)에 유생(儒生) 중에서 글을 능히 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물으니 공이 대답(對答)하기를 「유생들이 모두 부문(浮文:허황한 글이라는 뜻으로 문장학(文章學)을 말함.)을 익혀 요행만을 바랐는데 요사이는 강경(講經)을 많이 함으로써 꽤 학업에 열중함을 볼 수 있으니 강경으로 사람을 뽑는 일을 그만 둘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병신년(丙申年)에 좌승지(左承旨)에 올라서 아뢰기를 「국가에서 불(佛)을 금하는 법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수령 된 자가 잘 봉행(奉行)하지 못하기 때문에 승도(僧徒)가 날로 증가하니 청컨대 통렬하게 막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령이 이미 엄중한데 무엇을 추가한단 말인가!」 하여 공이 말하기를 「승도가 매우 많아 수 십년 간을 아무리 통렬하게 막으려 해도 근절(根絶)되지 않고 있습니다. 상께서 근절하려고 하신다면 그 근원을 막는 것보다 더 좋은 방도도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유래(由來)가 이미 오래되어 하루아침에 다 없앨 수는 없고 일이란 점차(漸次)로 하면 백성들도 동요하지 않는 법이요」 하여 공이 다시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알고 계시니 만세의 복이옵니다. 그러나 만일 아셨다면 마땅히 빨리 없애야지 어찌 천천히 하시려 합니까!」 하고 상소(上疏)를 다시 올렸는데 몇 천 몇 만 자(字)에 이르렀으니 이로서도 공의 유도(儒道)를 승상하고 불법(佛法)을 배척하며 정도(正道)를 보위하고 사술(邪術)을 내쳤던 마음을 볼 수 있고 공의 충의(忠義)가 만강(滿腔)의 단충(丹衷)에서 발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좌부승지(左副承旨) 손비장(孫比長)이 아뢰기를 「전자에 이극기(李克基)가 대사성(大司成)이 되어서는 힘을 다하여 지도하였기 때문에 유생(儒生)들도 모두 기꺼이 복종하고 학업(學業)에 열중하였습니다.」 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이극기(李克基)의 학문이 어떠하냐!」 하니 손비장(孫比長)이 말하기를 「이모(李某)의 학문은 매우 정숙(精熟)합니다.」 하였다. 무술년(戊戌年)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배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겼는데 상소차(上疏箚)를 올려 신정(申瀞)에게 전조(銓曹)를 오래 맡길 수는 없음을 논(論)하였고, 또 임사홍(任士洪)을 논하기를 「그는 귀양 살이 하는 몸으로 서울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 되어 신 등이 누차 그를 돌려보내기를 청하였으나 아직까지 그를 끊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의 죄가 극히 큰데도 중법(重法)으로 다스리지 않고 겨우 성밖에 귀양 보냈다가 곧바로 소환(召還)하시니 신은 상벌(賞罰)이 밝지 못하여 사람들의 징외(懲畏)하는 마음이 없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하나의 임사홍(任士洪)으로 인하여 죄를 입은 자도 많은데 만일 그를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법을 응용함이 공평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또 상소(上疏)하여 「유자광(柳子光)의 녹권(錄券)을 돌려준 것은 타당치 않다」 고 논하였고 또 윤비(尹妃)를 폐출(廢黜)한 일에 대하여 논계(論啓)하기를 「중궁(中宮)께서 이미 위호(位號)를 정하였고 원자(元子)까지 탄생하셨으니 가벼이 폐하시지 마시고 별궁(別宮)으로 거처를 옮겨 잘못을 뉘우치기를 기다리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공은 다시 정조사(正朝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경자년(庚子年)에 돌아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배 되었다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옮겼고 거기에서 다시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옮겼다. 하루는 임금이 화병(畵屛) 십이폭(十二幅)을 내놓고 시(詩)에 능(能)한 사람 십이인(十二人)에게 명(命)하여 각기 칠언(七言) 한 편씩을 지어 올리게 하였으니, 제일폭(第一幅)은 양귀비(楊貴妃)가 난간에 기대고 있는 그림이고, 제이폭(第二幅)은 후비(后妃)가 권이(卷耳:菜石)를 캐는 그림이며, 제삼폭(第三幅)은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그림이고, 제사폭 (第四幅)은 채옹(蔡邕:後漢사람)이 거문고를 뜯는 그림이며, 제오폭(第五幅)은 주공(周公)이 동정(東征)하는 그림이고, 제육폭(第六幅)은 취연도(醉宴圖)이며, 제칠폭 (第七幅)은 수양제(隋煬帝)가 진후주(陳後主)를 만난 그림이고, 제팔폭 (第八幅)은 소백(召伯:周公의 아우)이 감당(甘棠)아래에 쉬고 있는 그림이며, 제구폭 (第九幅)은 호파(瓠巴:옛날 거문고의 명인)가 거문고를 타는 그림이고, 제십폭(第十幅)은 증점(曾點:曾子의 아버지)이 비파(瑟)를 타는 그림이며, 제십일폭 (第十一幅)은 눈 속에 손님을 맞는 그림이고, 제십이폭(第十二幅)은 한유(韓愈:당(唐)나라 문장가)가 조주(潮州)로 좌천(左遷)되는 그림으로 공의 시는 제육폭(第六幅)에 해당하였는데 임금이 홍응(洪應)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다.

공은 그 사이에도 습독관(習讀官) 권평(權枰)이 호군(護軍)을 지낸 외에는 경력이 없는데 희천군수(熙川郡守)로 보내는 것은 과람(過濫)한 일이므로 교체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임금이 공의 말대로 따랐다. 신축년(辛丑年)에 다시 정조정사(正朝正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임인년(壬寅年)에 복명(復命) 하면서〔청화집(淸華集)〕〔유향신화(劉向新話)〕및 설원(說苑)〕〔주자어류(朱子語類)〕〔분류두시(分類杜詩)〕등의 책을 바쳤다. 이윽고 동지 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제배되어 정장(呈狀)하고 사직하기를 「성균관(成均館)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으로 신이 감당할 곳이 못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가려서 맡긴 것이니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이극기(李克基)는 학문이 순정(醇正)하고 인품이 극히 고상하여 종전에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는데 근세(近世)에 사유(師儒)가 된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였다.

갑진년(甲辰年)에 다시 공조참판(工曹參判)이 제수되었는데 겸대(兼帶)는 종전과 다름이 없었고 이듬해에는 가정(嘉靖)에 올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제수되니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 문계유(文繼遊) 등 六十 여인이 공의 겸직때문에 연명소(聯名疏)를 올려 다시 유직(留職)시켜 달라 청하였으나 임금이 황정(荒政)이 더없이 급하다 하여 듣지 않았다. 이윽고 과로로 난치병(難治病)인 중풍에 걸려 수족이 불인(不仁)하고 말이 아둔하게 되니 임금이 급히 내의(內醫)를 보내고 약물을 내려 치료하게 하였으며 이어 몸을 편히 하고 조리하라는 명(命)을 내렸다. 그로부터 육년 후(六年後)인 신해년(辛亥年:一四九一) 정월(正月) 초십일(初十日)에 고종(考終)하니 수(壽)는 육십육세(六十六歲)이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사림(士林)들은 너나 없이 차석(嗟惜)하였고 조정에서는 제사를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공(李公)이 졸(卒)하였다.


참판공 보촌서원 강당

공은 학술(學術)이 명달(明達)하고 조수(操守)가 견확(堅確)하여 꺾임이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성리(性理)에 정통(精通)하였는데 천착(穿鑿)하거나 곡경(曲徑)하는 일이 없이 되도록 대의(大義)를 포착(捕捉)하는 데에 힘썼으며 전후(前後)론 사석(師席)에 오래 있어 종학자(從學者)가 매우 많다.」 하였다. 공은 십수년(十數年)을 경악(經幄:經筵과 같은 말)에 있으면서 계옥(啓沃:임금을 일깨워 줌)한 바가 많았는데 항상 유술(儒術)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기의 소임(所任)으로 삼았다.

학도(學徒)들이 상소(上疏)하여 공의 유임(留任)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 사유(師儒)보다 더 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오래 맡겨 전일 하도록 하지 못하고 자주 외직(外職)에 출보(出補)시켜 백성을 구제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삼남(三南)에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두루 혹심(酷甚)하여 구황책(救荒

救荒策)을 아주 급히 서둘러야 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공을 기용(起用)하여 삼도진휼사(三道賑恤使)로 삼았다. 그 임무는 매우 방대(尨大)하여 어려움도 많았으나 공은 다방면으로 모색(模索)하고 주선하여 구제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온전하게 목숨을 건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공의 치적(治績)의 일례이다. 공은 항상 〔소학(小學)〕이 일상(日常)의 윤리상(倫理上) 도리(道理)에는 가장 적절하고 긴요하다고 여겨 이 책으로써 제생(諸生)도 가르치고 자질(子姪)도 교육시키면서 이르기를 「이 책의 가르침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잠시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시골의 여염(閭閻)에서 부터 서울의 태학(太學)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람의 자식이 마땅히 할 바를 알게 된다면 저절로 교화(敎化)가 크게 이루어질 터이니 나라를 경영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동서재(東西齋)의 유생(儒生)들의 존모(尊慕)가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니 사유(師儒)는 불가불 신중히 가려서 임명할 일이다. 공이 졸(卒)하신 뒤로 사화(士禍)가 끊길 사이가 없어서 청시(請諡)할 겨를이 없었으나 얼마나 다행한 일로 영광(靈光) 나주(羅州) 함평(咸平) 광주(光州) 전주(全州) 남원(南原)등 여러 고을 유림(儒林)들이 깊이 공의 학덕(學德)을 추앙(推仰)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천장(薦狀)까지 곁들여 보촌서원(甫村書院)에 받들어 뫼시니 지금까지 우모(寓慕)하는 처소가 되어있다. 묘소는 광주군(廣州郡) 돌마면(突馬面) 대원리(大院里) 백양동(白楊洞) 후록(後麓) 유좌원(酉坐原)에 있는데 지금의 명칭은 성남시(城南市) 하대원동(下大院洞)이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아산이씨(牙山李氏)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의(念儀)의 따님으로 일남(一男) 삼녀(三女)를 두었고 묘(墓)는 합조(合兆)하였다. 아들은 호(號)가 음애(陰厓)인데 사마(司馬)에 합격(合格)하여 서사(筮仕) 군수(郡守)요 장녀는 군수, 변륜(邊崙)에게 이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이심(李深)에게 삼녀는 사평(司評) 현준(玄俊)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손남(孫男)은 현령(縣令) 희업(熙業)이고 통덕랑(通德郞) 희광(熙廣)이고 희영(熙英) 다음에 희경(熙敬)은 충무위 사과(忠武衛司果)이고 손서는 우평(禹平)과 감역(監役) 이몽석(李夢錫) 부사(府使) 이영간(李榮幹) 현감(縣監) 조세찬(趙世贊)이며 여타는 생략한다. 오호라! 공은 명벌(名閥)이 화주(華胄)로써 일찍부터 청운(靑雲)의 길에 올라 현요직(顯要職)을 두루 거치면서 직책에 따라 소임을 다하여 많은 명성(名聲)과 업적을 올렸으며 전후로 차진(箚陳)한 바는 충성스런 마음이 말밖에 넘쳤고 의리(義理)는 늠연(凜然)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바가 있었으므로 족히 한 세상을 경성(警省)케 할 만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모두 〔실록(實錄)〕에 실려있어 후세에 감계(鑑戒)가 될 수 있으니 공은 가히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한 가지 한스러운 것은 공이 저술(箸述)한 시(詩)와 문(文)이 필시 적지 않았을 터이나 거의 수습(收拾)하지 않아 표범(豹)의 전신의 문채를 보지 못함과 같게 된 점이다. 그러나 다행히 찢기고 모지라진 몇 편의 글이 남아 그런대로 한 조각의 문채는 엿볼 수 있으니 이 한 조각의 문채로서 전신의 문채를 떠올리듯이 남은 몇 편으로 공의 전체를 이해한다면 아마 문자(文字) 이외의 것까지 상득(相得)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느날 후손(後孫) 용민(容珉)과 명재(明載)가 공의 장덕(狀德:行狀과 같은 뜻)을 부탁하였는데 돌이켜 보면 나는 글을 하지 못하니 만에 하나라도 표현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으나 서로의 처지가 완강하게 거절할 수만도 없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 대강을 간추려서 후세의 입언자(立言者)가 참고하게 하고자 하였다.

계유(癸酉) 중추절(仲秋節)에 고흥 후인(高興后人)
유태석(柳泰錫)은 삼가 찬(撰)하다.